뿌깊_needwork

일용직 노동자에게 오후 5시는 어떤 시간일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 노동자들은 하루에 열 시간 정도 일했다고 한다. 인력시장에서 오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은 사람들은 그날은 공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후 12시쯤에라도 누가 불러준다면 반나절 품삯이라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오후 5시는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 남았다기보다는 열심히 일해 봐야 별 소용없는 시간만 남았다는 뜻이다. 누가 봐도 포기해야 할 상황이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이다. 모두가 떠나버린 그곳에 버티고 남아 있는 이들의 심정은 대체 어떤 것일까?
그 시간까지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그는 어쩌면 왜소하고 병들어 보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들고 힘을 써야 하는 일에 부적격자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 시간까지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것을 보면 특별할 게 없는 그런 사내였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집으로 발걸음을 돌이키지 못하게 했을까?
그는 자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아빠!” 하며 달려 나올 아이들에게 떡 하나라도 내놓아야 할 가장이 아니었을까. 오늘 그가 먹을 걸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내일 아이들이 굶어야 한다는 그 절박함이 모두가 떠나버린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게 한 것은 아닐까?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마20:7)라는 그의 말에는 자신의 무능함과 막막한 현실에 대해 절망한 깊은 쓰라림과 탄식이 배어 있다.
이처럼 오후 5시 같은 인생을 묵상하다가 미국 대공황 시절의 제임스 브래독(James J. Braddock)이라는 권투 선수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신데렐라 맨>이 생각났다.
라이트 헤비급 권투 선수 유망주였던 제임스 브래독은 잇단 패배와 오른손이 골절되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권투 선수의 삶을 접고 부두 하역잡부로 살아갔다. 부상을 입었지만 먹고 살아야 하기에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일해야 했다. “제발 나를 써달라”며 통증을 참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그의 눈동자에는 처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 대공황의 물결 속에서 한겨울에 최소한의 난방도 할 수 없게 된 극도의 가난 앞에서 감기와 폐렴에 걸린 아이들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까지 갔다. 아이들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자존심을 접고 챔피언 클럽에서 동전 몇 푼을 구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 제임스 브래독. 그의 처절한 모습이 바로 오후 5시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던 인생의 모습은 아닐까.
이런 인생에 찾아오는 한줄기 희망이 있다. 바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오후 5시에도 일꾼을 찾으러 나선 포도원 주인처럼 끊임없이 그분의 백성을 찾고 계신다.
자랑할 것은커녕 부끄러움밖에 남은 것이 없는 사람에게도, 절박한 심정으로 그저 버티고 서 있을 뿐인 사람에게도 그분의 나라는 임하신다.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님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구원을 가르치려 들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통렬한 메시지를 주셨다. 그러나 오후 5시 인생 같은 절망의 유대 땅을 향해서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다. 그분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리로 친히 찾아오셔서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처음 된 자와 동일하게 채워주셨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낙심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주신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
모두가 끝장이라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 일말의 자존심조차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 같은 상황일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어떤 실패도, 그 어떤 좌절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내 육신과 영혼을 할퀴고 지나갔다 할지라도, 그래서 오후 5시 같은 인생의 자리에 서 있다 할지라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셨다.
누군가의 말처럼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으시기 전까지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하나님나라는 공로로 받는 상급이 아니라 은혜로 얻는 선물이다.
-오후 5시에 온 사람, 송병주